Space xx

Pessimistic Optimists

Artist : 유나얼

전시기간 : 2020/04/08 ~ 2020/04/30

작가 : 유나얼 전시기간 : 2020. 4. 8. ~ 4. 30 전시장소 : space xx (서울시 영등포구 도림로128가길 1, B1) www.facebook.com/spacexx www.instagram.com/spacexx



Pessimistic Optimists

작가 유나얼은 말수가 적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말을 꽤 많이 하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창작물을 설명할 때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화자(speaker)가 될 경우도 있다. 바로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시간이다. 직접 대면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그의 작품을 만나면 된다. 그 안에는 참 많은 말씀이 담겨 있다. 흑인, 버려진 물건, 아득한 추억으로 대표되던 유나얼의 작업에 언젠가부터 성경의 비중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보고, 즐기고, 분석하는 미술의 차원을 넘어서는 읽고 묵상하는 미술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창작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일인지 생각한다.” 유나얼이 작업 이야기를 할 때 자주 하는 말이다. 작가로서 활동한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염세주의적인 낙관론자이다.” 스페이스엑스엑스(space xx)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며 작가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문장이다. 그리스도인은 행복하다. 복음을 따르며 이미 이뤄진 것에 감사하며 산다. 충만한 삶이다. 그러나 그들은 슬프다. 세상의 죄악과 불행 때문이다. 복음을 따르는 길이 현실의 삶을 더 어렵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감사히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을 품고 살기에 비관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 상황에 놓인 존재다. 최선을 다해 성실히 현실을 살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길 기다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의 사랑하는 이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아가서 2:10 KJV) 작가는 (2020)에서 왜 이 구절을 선택했을까. 작가의 성경 드로잉을 따라가다 발견한 구절이다. “땅에는 꽃들이 나타나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이르러 멧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를 내며 연한 포도가 달린 포도나무는 좋은 향기를 풍기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떠나가자.”(아가서 2:12~13 KJV)
시리즈(2019~2020)가 전달하고자 하는 기쁨과 환희는 무엇일까. 이미지의 조각들을 살펴보며 물음표 없는 질문 아닌 질문을 던져 본다.

그러고 보니 예술가의 삶도 비슷하다. 예술가는 비관론적인 이상주의자이다. 과거로부터 그들은 보편적 미와 진리를 추구해왔다. 예술은 분명 즐거움과 행복을 전파하고 치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때때로 예술가는 세상의 어둠에 주목하고 불편함을 유발한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고뇌하며 괴로워할 때도 있다.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고, 시스템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위태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절망을 원해서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하기 위함이다. 불편함은 진실을 향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길이 순탄하진 않지만 멈출 수 없다. 이처럼 행복과 불행을 함께 전달하는 예술가는 모순적 존재이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을 압도하는 설치이자 성경 드로잉인 (2020)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작가로서 두 겹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유나얼이 자신의 존재성을 전면에 드러낸 작품이다. 두 개의 기둥을 지지대 삼아 그는 말씀을 그려 내려갔다.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하다. 영감과 보존의 말씀이다. 작가로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선한 창작이다. 그런데 성경 드로잉뿐만 아니라 그의 대부분의 드로잉 작업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천진함이다. 작가는 실제로 자신이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을 활용하거나, 어린아이의 필치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선을 좋아한다. 이는 믿음의 부분과도 닿아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14 KJV) 시리즈(2019) 역시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작업했다. 작가가 옛사람, 그들이 사용했을 법한 물건 등에 집중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즈음 유나얼의 머릿속을 맴돌던 두 번째 문장인 “어디에서 예술을 찾는가(Where Seek Art)?”를 소개해야겠다. 예술은 작가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역에 속해 있지만, 세상에 나오는 순간 공적인 시스템 안에 놓인다. 예술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이상에도 발을 딛고 있다. 예술은 예술가가 마주한 현실에서 시작되고 그의 내면에서 완성된다. 현실에 함몰된 예술은 창작물이 될 수 없다. 이상에만 빠져 있는 예술은 자신의 목소리를 널리 퍼트리지 못할 것이다. 예술은 현실과 이상, 외부와 내부 사이를 부유하며 곳곳을누비고 다닌다. 과연 예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인가? 어디에서 찾아져야 하는가? 예술은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수만 가지의 답이 나올지도 모를 질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유나얼에게 그 답은 명확해 보인다. 예술은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람들을 평온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것이다. 강한 어조이지만 강요하진 않는 그 묵직한 울림은 내면에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Where Art Thou? Whom Seek Ye?

“어디에서 예술을 찾는가?”는 창조주가 창조물에게 했던 두 개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창세기 3장 9절의 “네가 어디 있느냐?”와 요한복음 18장 4절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이다. 전자는 인간의 원죄와, 후자는 원죄의 대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된다. 선악과(善惡果), 그리고 생명 나무로 이어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제거되었다. 이제 (2020)를 구성하는 다양한 오브제들의 퍼즐이 맞춰진다. 바닥에 깔린 카펫, 옷걸이, 책상 위의 성경과 그 위의 낡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물결 영상, 숨소리, 다리가 세 개인 조명은 이야기를 엮어낸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세상, 두 개의 나무와 종이에 인쇄된 말씀. 이제 세 개의 나무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양옆의 죄인, 이 모두를 비추는 빛, 삼위일체인 하나님, 생명의 상징인 물,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숨소리. 숨소리다.

물론 유나얼의 예술은 이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이상을 향해 서 있지만 그의 시선은 현실을 살펴보길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위치한 사회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숙고한다. 이미 잘 알려졌듯 작가는 흑인 음악과 문화를 좋아한다. 어떤 의도도 없는 순수한 호감이다. 그런 마음을 고이 모아 흑인의 이미지를 작품에 담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것이 미국 문화의 범주 안에 속한 흑인 음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일단 경험해야 한다. 문화와 문화 사이의 영향 관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2020)는 작가가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2012)의 주인공을 그린 드로잉과 그가 발견한 ‘블루보이 아트 갤러리(Blueboy art gallery)’에 걸려 있던 흑인들의 초상화를 촬영한 사진을 결합한 작품이다. 장고의 파란 옷은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의 회화 <파란 옷을 입은 소년(The Blue Boy)>(1770)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루 블러드(blue blood)’란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연결고리가 전혀 없을 것 같았던 이미지들의 관계가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라 믿어지는 호감은 그렇게 복잡한 상황의 교차 속에서 시작되었다. 우연 같은 필연이다.

한편 하얀 저울 위에 놓인 오브제인 시리즈(2020)에는 필연 같은 우연이 존재한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오브제들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작가가 발견한 것들이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원래 함께였던 것처럼 완벽히 들어맞는다. 그의 콜라주에 머무르는 이미지들도 그렇다. 처음부터 그랬듯 편안하다. 참 많은 조각이 모여 있다. 작은 조각이지만 소중하다. 조각이 모여 함께이니 더욱 어여쁘다. 유나얼의 작품들을 마주하다 드는 생각이다. 이 세상은 왜 편안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할까? 어긋나는 파편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일까? 날카로운 모서리들은 서로를 상처입힌다. 세상을 향하던 시선이 이내 나 자신을 향한다. 잠시 작품에서 시선을 떼고 나의 하루를 함께 했던 작은 조각들을 떠올린다. 어김없이 (2004)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늘은 하모니(harmony)를 이룰 수 있길 바래본다.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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