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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resonance [푸른공명]

Artist : 이민희

전시기간 : 2019/12/14 ~ 2019/12/22

푸른공명 이민희 Photo Exhibition 대안예술공간 이포 2019. 12. 14(토). ~ 2019. 12. 22(일)


년 개인전, 관객이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근원지를 쫓는 작업을 시도했고 슬픔의 근원지를 쫓아 추상적인 이미지와 심상 사진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자문해가는 과정 중 내 욕심과 허망함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 후, 무작정으로 어머니의 공간을 촬영하며 ‘내 무의식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5년 만에 뵌 어머니, 가족보다는 한 존재로서 마주하고자 노력했다. 한 존재의 공간의 사념과 시간의 흔적에서 생멸의 지옥을 바라보았다. 한 존재의 울림은 내게 잠재된 어머니와 내 삶에 대한 허망함을 만나게 했다. 스스로에게 분노와 참회의 시간을, 병든 어머니는 내게 있는 욕심과 사람다움에 대해 자문하며 가족들의 흔적들을 기록했다. 이번 작업에서 어머니의 공간과 소품 그리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심상을 담은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본 작업이였다. 어머님의 삶을 은유적인 표현하기 위해 가족들의 생활공간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리서치 작업으로 어머니와 소통하는 시도였다.
이로 하여금 어머니와 나, 사회적인 소통의 의미에 대해 음미와 변화의 시작이 된 첫 시도의 작업이다. / 작가노트 중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애도: 이민희의 <푸른 공명>에 대하여 / 남선우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도 없는 그런 것.

롤랑 바르트[1]

사진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거나 이미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카메라 앞에 선 대상의 현존을 잠시 붙들어 그 흔적을 기록하는 행위다. 사진은 카메라 앞 대상, 즉 피사체의 존재 때문에 생겨난 빛이나 에너지의 흐름이 감광판에 자국을 내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이 대상과 너무도 닮았다는 것에 현혹되어 이 사실을 종종 잊지만 사진은 덜 마른 시멘트 위에 찍힌 누군가의 발자국이나 모로 자고 난 얼굴의 베갯자국과 그 태생이 같다. 그러나 ‘거기에 그것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없거나, 혹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이민희는 어머니와 어머니가 낸 자국들을 그러모으듯 사진을 찍었다. 작가는 어머니가 긴 시간을 보내 온 공간과 오래 간직해 온 사물들을 하나 하나 살피고 되살폈다. 한해동안 꾸준히 이루어진 방문과 작업의 결과, 전시에 공개된 사진들은 네 가지 결로 나뉘는 듯 보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의 물건들이다. 얼마나 넉넉한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작가의 동생까지 쓰고도 남아있는 소창 기저귓감이나 유기농 제품임이 또렷하게 적혀있는 배냇저고리부터 반짓고리, 실패, 다듬이 등, 어머니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이 공간에서 보낸 물건들은 어머니의 지나간 한 때를 붙들고 있는 듯하다.
두 번째로는 어머니가 공간에 낸 자국들을 사진으로 채집하는, 즉 이미 공간에 남은 지표를 다시 사진으로 포착하는 이중의 지표 작업이 있다. 뜯어진 방충망을 두 번에 거쳐 테이프로 막은 자국, 벽지에 밴 누렇고 붉은 얼룩, 매일매일의 기도가 붙는 자리, 벗겨진 페인트 등은 모두 일상에서 서서히 축적된 자국으로, 우리도 작가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하루 하루를 짐작하게 한다. 
전시 공간의 초입에 나란히 붙은 세 장의 풍경사진은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가는 그간 바람이나 미세한 빛 등 자연에 깃든 비가시적 요소들을서정적인 프레임에 담는 일련의 사진 작업을 선보여왔다. 비가 오는 연못 위에 살짝 스치듯 내려앉은 무지개나 해질녘에 언뜻 지나가는 빛무리 등 필멸하는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잠깐의 시간을 포착한 사진들은 어머니의 공간을 찍은 사진과 마주보게 배치되어 서로의 감각을 증폭시킨다.
마지막으로 전시 중에 불쑥 한 번 등장하는 어머니의 손이 있다. 솜을 얇게 둔 차렵이불 위로 늘어진 얇은 손은 이불의 윤기와 대조적으로 파리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시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음’의 증거로 기능한다. 따라서 이 한 점의 작업은 전시의 호흡에 맞추어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상실감에 더 깊이 빠지게 하거나 문득 빠져나오게 하는 양가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환기하는 역할조차도 전시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정서를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사진은 과학의 원리에 기반을 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지표이기도 하지만, 필멸할 존재들이 사라지기 전 만들어낸 자국이라는 점에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사진은 상실 혹은 조만간 다가올 상실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어머니의 공간, 사물을 기록하는 작가의 애도는 결코 성마르지 않다.  
‘애도’를 잃어버린 대상의 표상을 간직하려는 시도라고 말하기도 하는데,[2]이런 점에서 사진찍기는 근본적으로 애도의 행위이다. 어머니와 그 주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한 작가의 애도이자, 자신또한 매일 죽음에 가까워지는 존재인 작가가 역시나 상실중인 대상으로서 어머니와 만들어내는 같은 진폭의 울림, 즉 공명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1]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역, 『애도일기』, 걷는 나무, 2019, p.123
[2]VamikVolkan, ‘Unending Mourning and its Consequences’,in Psychotherapie Wissenschaf, vol.1,no.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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