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EXHIBITION

100 - Capsule = ?

Artist : 박준식

갤러리 : Space xx

전시기간 : 2022/10/07 ~ 2022/10/27

100 - Capsule = ? / 박준식 개인전 / Space XX


<작가소개>
박준식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성북구와 영등포구를 거점으로 평면 미술 중심의 시각 예술 작가 활동을 하고 있으며 독립적인 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사건과 문제들의 이면을 담아내고 물음을 던지며 비극과 희극이 동반되는 시각 언어로서 작업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시련과 역경을 넘어서고자 하는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이미지로서 강력하게 시사하고 발언하고자 한다.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 이 전시는 2022년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로,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100 – capsule = ?>
박준식
인간은 누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근본적인 진리는 누구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계속 변함없는 물음 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100세 시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대부분의 이들이 너나 할 것없이 100세를 누리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어찌할 수 없이 안타깝게도 짧디 짧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하여 저는 이러한 반복되는 모순과 부조리를 이번 전시와 작품을 통해 여러측면에서 다각적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또한 보다 깊이 있게 돌이켜보고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며 이젠 더 이상 “언젠가” 라던가 "어떻게든 되겠지" 와 같이 무책임하고 막연한 태도로서 평생의 숙제로 미뤄두지 않으려 합니다. 더불어 단순히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 치부하는 등 비겁하고 원론적인 말들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하며 마치 달관한 듯이 독선적이며 교조적인 태도로서 임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며 나름대로의 결심과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끝까지 끊임없이 밀어닥쳐오는 물음표에 대한 적절한 답과 대안을 제시하며 자신의 삶과 함께 맞물려가는 모든 이들의 삶에 있어서 복잡하게 뒤엉킨 매듭을 풀어내듯이 제대로 갈무리 지어보고자 합니다.
또한 이와 함께 우리가 매일같이 때론 치료를 위해, 건강을 위해, 고된 상황과 힘든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누군가의 체제 아래에 섭취하고 있는 약들에 대하여 태어날 때 부터 현재까지 여러 질병과 이유들로 약을 섭취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관점에서 보다 심도 깊게 리서칭하고 고찰해보는 기회를 가지며 전시와 작품을 구성해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이번 전시에서 일궈내게 될 결실들에 대하여 자신이 실존하고 있는 삶과 이를 이루는 작업들에 있어서 현실의 결과 함께하고 있음에 진정 사람과 사람이 맞닿고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예술로서 발언하고 실천하며 개인의 삶 이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시선들과 일면들을 함께 공유하고 교감하며 함께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정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시간을 태우는 그리기의 몸 짓 / 한수지 독립 큐레이터

선들이 쌓인다. 숱한 선들이

하나를 걷어내면 다른 것이 나오고, 계속 해서 헤집고 들어가도 무엇인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자국들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들였을 시간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작품과 처음 마주한 날, 작가가 들고 있던 파일 안에는 작은 엽서크기의 드로잉들이 가득 했다. 선들은 거칠었고, 작은 프레임 안에서 자꾸만 바깥으로 뻗어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선들을 들여다 볼 때면 그 안에 자꾸만 기어들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그 선들이 어디까지 뻗어나가려 애쓰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무엇을 표현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시간을 태우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받았던 것 같았다.

그것은 무엇을 표현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표현보다는 몸짓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붙잡고 '이걸. 보고 그리는 내가. 여기. 있어요.' 라고 애쓰는 외침 같은 것들이었다. 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추상에 가까워 보였고, 물감의 덩어리감 같이 묵직한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선을 가지고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이 위태로우면서도 정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외침들은 작가의 작품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소리 지르는 검은 선들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투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선들은 캔버스의 가장 밀착되어 있는 부분에서부터 색과 함께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이야기한다. 이들은 제목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사신의 각본> <비록 톱니바퀴가 될 순 없다 해도> <이방인> <변신> 과 같이 문학작품이나 고전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으면서 동시에 <29세까지의 죽음을 넘어> <2020+2021+2022>처럼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들을 작품의 전반부에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무수히 많은 점을 찍고, 선을 그려 연결하며 장면과 현실을 뒤 섞는다. 이 안에서 죽음은 '100'이라는 숫자를 카드로 내걸고 삶의 한정성을 예고하지만, 뜻하지 않은 우연한 만남 속에서 <속내를 알 겨를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과 혹은 <너무나 빨랐던 충돌>과 같이 바스러지는 삶들을 비추고, 동시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말할 수 있는 복잡한 가능성들을 이야기 한다.

실눈을 뜨고 이 그림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결코 어둡지 않은 풍경들이다. '작가가 시간을 태우며 그리는 풍경은 무엇인가? 이 숱한 선들은 어디까지 얼마나 힘 있게 뻗어나갈 수 있을까?' 이 선들이 멈추지 않는 한, 작가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선들의 움직임은 작가의 실존을 증명하는 일종의 몸 짓 이며, 이렇게 애쓰는 동안 작가는 죽음과 동시에 살아감 혹은 살아갈 것을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권유한다. 전시장을 나가는 사람들의 전과 후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디오게네스 키니코스” - 삶을 사랑하는 기술
박준식의 개인전에 부쳐
이영철 (큐레이터/미술평론가)
삶을 사랑하는 기술”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계원예술대학교의 어떤 수업에서 박준식은 디오게네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루타르코스 3인에 대해 조사하여 과제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금융자본에 저항하며 점령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디오게네스는 넝마 같은 옷을 입고 남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고 아테네 시장 한 가운데서 술통 속에 살면서 자유의 철학을 몸소 실천했고, 본성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단순하고 행복할 수 있는지를 아테네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동물적이고 독특한 행동 덕분에 그는 “디오게네스 키니코스” 즉 “개 같은 디오게네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견유학파의 영어 표현인 cynic은 kynikos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만큼 원래 cynic은 문명의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가난하고 금욕적이며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을 뜻했다.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쓸데없이 뼈 빠지게 일하는 대신 사람들은 본성이 권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들은 너무 어리석어서 스스로 불행한 길을 택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 불행한 길을 택할까? 문명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 거대 도시에 살면서 예의바를 것을 강요 당한다.'
박준식이라는 한 청년 작가의 이러한 발가벗겨진(?) 주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몹시 낯설어진 시대에 회화라는 매체가 대학과 시장을 점령해 버렸고 기성 작가들이 회화로 복귀했다거나 심지어 비평가들도 노후를 위해 그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 온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무엇보다 존중되는 시대에 자신의 회화를 시대에 대한 기록이자 발언으로 여기며 작업을 하고 있는 박준식은 참신하다 못해 기이하고 위험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작업 일기를 계속 써온 그는 이렇게 말을 한다.
“난 적절히 배합되고 계산된 생산품이나 상품으로서의 무늬나 기호, 패턴 같은 것이 아닌 내 눈앞에서 매 순간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들며 직면하게 되는 현실과 그러한 자신의 삶을 극복해내기 위해 (그림을) 그려내고자 한다.”
80년대에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그의 마지막 강의를 했을 때 주제가 견유학파였고 그때 그는 “파르헤지아”(진실에의 용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파르헤지스트라 불렀다. 좀비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고도화된 한국 사회에서 파르헤지스트가 많아져야 하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박준식은 외골수로 보이는 자기성찰형의 작가이다. 그는 지진계의 바늘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림을 그린다. 성장통을 겪는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한 소설에서 몬테 베리타의 성자인 헤르만 헷세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을 때 자신을 나무라지. 그런 나무람을 그만두어야 하네. 불을 들여다보게, 구름을 바라보게. 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묻지 말도록.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님 혹은 그 어떤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야. 그런 물음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런 물음들 때문에 인도(人道)로 올라서는 것이며 화석이 되어가는 거지.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악령이지. 결코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나무랄 데 없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렸을 때, 그때는 아브락사스가 떠나. 그때는, 자신의 사상을 담아서 끓일 새로운 냄비를 찾아 자네를 떠나는 거라네." (헤르만 헷세, [데미안])
아브락사스. 태양계의 7행성을 가르키는 고대 신들 중의 하나이자 또한 악마 중의 하나.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융은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 안에 결합된 신이라고 정의하였고, 그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사탄의 개념보다 상위 개념의 신이라 했다. 인간-신 혹은 초인. 알에서 나온 새가 날아가는 곳은 아름답지만도 않고 추하지만도 않은 그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지닌 세계다. 박준식의 회화는 지그재그로 붓이 쉴 새 없이 회전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소용돌이 바람을 담은 세계다.
회화에 대한 현대 사회의 믿음은 회화의 중심 신화 중의 하나이며, 이는 생산 경험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신화다. 과거의 예술 체계에서는 예술가들이 구체적 용도로 주문을 받아 작업했기에 생산자의 노동이 매우 구체적이었다. 자본주의 시장 체계에서는 노동이 구체적 장소나 목적과 무관하고, 미리 정해진 주제도 없으며 따라서 실행해야 할 구체적 과업이 없고 다만 전반적인 창조성만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노동이 추상적으로 바뀌었다.
그에 대해 여전히 회화에 기대를 갖는 이유는 회화가 가치의 구체적 기반에 대한 욕구desire가 실현되는 마지막 장소 중 하나라고 여기는 점과 연관이 있고 이 경우에 회화가 산 노동의 섬유질을 파악하는 준거가 된다는 일루전의 인상을 NFT가 그렇게 쉽게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추상화 과정 속의 여전한 그 노동이 개인적이고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한 상상적인 장소의 실존을 약속해준다. 회화 작품은 준quasi 주체, 즉 인간 주체의 대리 역할 같은 힘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회화의 능력(실제로 사람처럼 작동한다고 암시하는 그 독특한 힘)은 그것에 부여된 가치와 어떠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의 신체적 행위에 귀속되어야 한다.
박준식의 회화에서 일차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작품의 형식주의적 요소보다는 그가 그리는 그림들이 작가의 신체성의 뚜렷한 지표적 기호로서 특징을 풍부히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회화 작품들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에너지로 충전된 배터리이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그 흔적을 남겼고(설령 기계적으로 생산된다고 해도 손글씨의 암시가 지속됨) 의도적인 예술작품, 그 자체로 주체가 있는 작품의 인상을 높여준다. 모든 작품은 작품을 존재하게 만든 그 사람의 지표로 기능할 때 가치가 부여된다. 회화는 그것이 '준quasi 인간'임을 암시함으로써 좀 더 나아가는 것 같다. 혹은 이것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자면 회화는 특히 가치에 있어 실체를 갈망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는 것으로 잘 준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회화에서 평면은 더 안으로 무한히 열려진 심연의 세계이기도 하다. 민들레 꽃가루를 들판에서 채집하여 보관해 두었다가 쌓아올리거나 평평하게 전시장에 깔아서 작품을 해온 볼프강 라이프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꽃가루는 당신이 말한 게 전부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내가 모르고 또한 당신도 모르는 훨씬 더 많은 것이다. 꽃가루는 꽃가루이고, 나는 어떻게든 그것에 관여하여 그들 모두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꽃가루를 만들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밀크 스톤을 또한 얻었다.” 그는 어느 날 인도로 떠났다. 회화가 마주하는 것은 화가의 자아가 아니라 그/그녀의 부재한 자아가 그 안에 존재하는가를 암시하는 비움-기호의 표시들이다. 즉 반드시 곧 죽을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 장소, 하늘과 땅, 신들(영들)이 모두 타자가 되어 채워진 내 그림이라는 전제가 선재 하는 한에 있어, ‘하나의 효과'로서 현전의 인상을 나타내는 기술, 방법 및 기교를 터득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회화(의 전시)는 세상으로부터 사각형 안으로 방어적인 도피, 혹은 형식적 질에 대한 해결, 그리고 대중들의 취향에 대한 존중이라는 필요조건이 아니라 관람자의 경직된 기대를 바꿔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것은 스마트 기기의 혁명 속에서도 여전히 회화가 화가의 산노동의 섬유질이라는 인상을 유지하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 회화가 사물을 새롭게 보여주기 위해 화가는 색의 입자들, 운동, 시공간의 흔적들, 채움과 비움, 내부 섬광, 시뮬라크르 그리고 신-인간의 아이콘들 따위의 모든 것들을 정교하게 사고하고 느끼며 자신의 오드라덱을 어디서든 발견해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흑백색의 톤 안에서 이따금 얼굴들이 갑자기 빛을 발하더라도 스킬을 자랑하는 어떠한 표현력은 보이지 않고, 그 자체로 확인할 수 없으며, 인물들의 제스처로 대강 축소될 수도 없다. (<신세계의 신>, , <적자생존>, <굴레 속에서>, <죄인과 부역자들에 저항하며>, 2019) 정확히 그의 그림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바로 기이한 비가시성이다. 볼 수 없지만 누군가 어떤 메시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그럴 거라는 생각-느낌의) 그 의미는 주제화나 표현이 아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의 양치기 소녀가 나라를 구하는 18세 잔 다크 이야기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쪽의 종교적 신비화나 위조된 이야기가 아니다. 각기 다른 얼굴들을 통한 모든 형태의 가시성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보이지 않는 얼굴을 감추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환원적 개념화를 무시하고 결정시키는 신(유령)라는 관념을 의미한다. 작가가 내뱉듯 설명하는 의미의 투명함은 논리적 매혹과 별개로 윤리적 갈등을 수반한 피할 수 없는 집착을 낳는다. 우리는 서로 엉겨 붙어서 밀고 당기고 끝없이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타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볼 수 없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가 모든 것에 얽혀 있지만 ‘출구 없음’ 장소이다. 서로간에 일정한 간격이 없는 혹은 경계를 알 수 없는 상태의 강렬한 네트워크 속의 그것들(인간, 해골, 사물, 동물, 인간-신)은 항상 단순한 표현, 괴물, 몸 이상이다.
“재앙의 끝에서 불행과 행복이 등을 지고 있다. 누군가와 무언가의 계산은 뒤틀려 있다. 각자 다른 재앙의 계산법. 누군가에겐 절망을 누군가에겐 기쁨을. 공존의 거짓말.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언가에게. 재앙 속 아이러니” (박준식. 2022.08.01 일기)
새로운 나쁜 혹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의 발걸음으로 이 청년 작가는 전쟁터에서 공적인 사역의 책임감을 느끼며, 우리가 저들을 심판하고 심지어 사형을 선고한다고 해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발산하기에 우리는 불편한 감정으로 그것들에 빠지고 집착하게 된다. 그의 그림들은 강렬도가 각기 다르지만 그 접착과 응집력이 관객의 모든 의도를 산산조각 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에서 돌아서도 싸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언급한 바 있는 끈적거림의 악마적 성질이 같은 잔상으로 남는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생각 속에 떠오르는 의미를 적절하게 주제화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것이 우리를 어이쿠! 하며 감탄, 칭송, 불쾌감, 또는 좌절, 짜증, 화냄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를 사로잡는 지점이다. 회화는 그 평면이 기이한 얼굴이다. 우리가 그 얼굴에 결코 애매하지 않은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으나 어쩌지 못하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일 것이라고 언어적 상상(의미화)을 할 뿐 시대에 뒤쳐진, 궤도에서 벗어난 상태. 한 마디로 시대착오성을 드러낸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들은 내가 차지할 수 없는 시간, 너, 혹은 누군가의 다른 시간을 포함하지만 모두가 필멸자임을 슬프게 경고한다. 그 필멸은 거꾸로 모든 형태의 절대적인 동시성, 시간의 완전한 융합, 시간의 완전한 일관성을 막는 최후의 저항선이다. 서로 간에 몸은 뒤엉켜 있지만 당신은 항상 나의 시간과 관련하여 비어져 있는 항아리,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박준식의 그림들은 근세의 새벽이 열리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토텐탄츠>라는 주제에 정신적으로 감화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현재의 사회적 상황의 출구 없음에 심리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에 목판화나 책 그림의 형식에서 그는 모티브, 인물 묘사, 분위기, 기법 등을 참조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박준식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스위스 바젤에 살며 독창적인 목판화를 제작한 한스 홀바인을 많이 참조한다. 기근, 전쟁, 전염병이라는 치명적인 공포가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기를 통해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의 부패와 악행들을 고발하였다. 중세 미스터리 연극과 유사하며, 죽음과 함께 춤을 추는 우화는 죽음의 필연성을 일깨우고 항상 죽음에 대비할 것을 권고하는 메멘토 모리의 교훈을 심어 주었다. 극적인 효과와 역동적인 액션으로 가득찬 사회 비판적 그림은 박준식의 도덕적 열정에 불을 지폈고 죽음은 부와 계급을 가리지 않고 폭력적이라는 깨달음을 자신의 회화에 이끌어 들이고 있다. 귀족 부인을 호화로운 침대에서 끌어내고 선원의 돛대를 둘로 쪼개버리고 흑사병에서 누구도 탈출하기 어렵다. 가진 자와 권력자를 힘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리즈는 익살이 다분한 풍자화와 정치 만화를 선도했다.
생애의 기록이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미술사의 경이로운 존재인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들은 지옥, 연옥에 대한 거침없는 상상력과 그 형상화 능력이 현대인들에게 조차 놀라운 것으로 그것은 이미지의 존재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 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하고, 모든 의도와 모든 언어를 물리치는 잠재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모든 경제적 기술적 교류 속에서 트랜드의 꼬리를 잇는 겉보기의 동기화된 사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외의 시대착오적 벗어남은 측정가능한 원점보다 불균형, 기점을 초월하는 섬광이다.
(에필로그)
그가 좋아하는 노래 The Offspring 의 The kids aren't alright 가사는 애잔하다.
When we were young the future was so bright
어린 시절에는 앞날이 아주 밝아 보였어
The old neighborhood was so alive
나이 드신 이웃분들은 건강했었고
And every kid on the whole damn street
거리의 아이들은 맞는 일도 없었고
Was gonna make it big and not be beat
모두 성공할 것 같았어
Now the neighborhood's cracked and torn
지금 이웃집은 무너져 내려 헐리고
The kids are grown up but their lives are worn
아이들은 어른이 됐지만 그들의 삶은 퇴색해 버렸지
How can one little street Swallow so many lives
이 작은 거리가 어떻게 그 많은 삶을 앗아 갈 수 있을까?
Chances thrown
기회는 사라지고
Nothing's free
공짜인 것은 아무 것도 없어
Longing for what used to be Still it's hard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지만
Hard to see
너무도 어려워
Fragile lives
삶은 아슬아슬하고
Shattered dreams
꿈은 산산조각이 났어.
Americana (1998) - The kids aren't alright / The Offspring 가사 중 일부를 발췌
<가사 출처 : https://gasazip.com/193525>

인간은 각자 자신의 윤리적 보초로서 죽음을 갖고 산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희망과 상관 없이 배우고 유지하도록 하는 이중의 전제에서 작동한다. 인간(필사자)은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확보하는 - 좋든 나쁘든 - 유한한 합리적 동물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보증으로도 확보할 수 없는 것을 산출하도록 장난스럽게 운명지워져 있고, 때로 자신이 신이 되어 함께 죽는다.
얼마전 데미안 허스트(57세)가 대체불가능 토큰(NFT)으로 팔린 디지털 작품의 원본인 유화 그림 수백점을 난로 불에 몽창 태워버렸다. 이것은 갤러리 전시의 일부였다. 허스트는 자신의 최근 컬렉션을 NFT로 구매한 이들에게 물리적 원본까지 사들일지, 아니면 NFT로만 사들일지 결정하도록 했다. 또 NFT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물리적 원본을 파괴할 것이라고 미리 알렸다. 이날 취재진을 불러 모아 대대적인 포토콜 행사를 한 것이다. 그는 한 해 앞서 자신의 첫 NFT 작품 1만점을 ‘통화(The Currency)’라는 제목의 컬렉션으로 묶어 판매했다.
당연히 원본이 남게 됐는데 갤러리 측은 그 중에 수효가 반쯤 되는 구매자들이 NFT 작품만 남겨지길 원해 그들의 것을 불태우고 있다며 향후에 더 많은 원본들이 불태워질 것이라 예상하였다. 원본을 파괴하고 디지털 카피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원본을 태워버린 행위는 원본에 대한 관념을 불태운 것이므로 파괴인 동시에 '정화 행위'로 보여질 수 있다. 디지털 복제물이 원본을 대체하여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통화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재료에 대한 낡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구매자가 항상 존재하고 유통이 상대적으로 빨라서 돈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일정한 경계 안에서 반복적으로 작업하기가 편리하여 그림을 그리고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이런 사고는 부수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회화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편리한 방어적인 도피 수단, 반복되는 형식주의 실험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관념을 위해 낡은 관념이 대체되어온 백년의 역사 속에서 원본의 파괴로 인해 물체가 겪는 혹은 그것을 재로 만들어버리는 행위가 무엇일까 좀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원학적으로 "물체(Matter)가 실체와 같다"라는 오래된 낡은 생각과 그에 덧씌워진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본령이 된 사고는 한편에서 거대한 착각의 유산을 키워왔다. 제의적 가치가 추방되고 인공의 문화 쓰레기가 미술관을 가득 채우고 거대한 규모로 아바타를 산출되는 사태를 맞게된 총체적인 재난과 현대미술의 실패 속에서 윤리적인 질문이 훨씬 중요해진 국면을 맞은 것 같다.
물체는 궁극적인 실체도 아니고 도구적 용도의 재료도 아니다. 그것은 라틴어 mater, "parent", "plant," "mother"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불로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는 그 일이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 사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물체는 동이 트면서 깨어난다. 이 새벽은 폭력이다. 격렬한 새벽의 문제는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물체는 마음과 몸이다.
물체는 표현성 그 자체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표현한다. 언제든 이미 무한으로 스스로 생성하지만 도움, 출구 또는 외부가 없다. 표현이며 재표현이기도 하다. 재표현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동등화이며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Jean paul Martinon, [Curating as Ethics] p. 531, e-book)
박준식의 그림이 어느 날 눈을 뜨는 것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것이지만 심리적 현상인지는 불확실하다. 어두운 빛을 식별하기에는 이성은 훨씬 둔감하고 그것의 정체는 알 수가 없다. 카라밧지오 그림의 어둠, 김주영의 검정, 박이소의 검정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마지막 숨이 끊어지면서 "어두운 빛이 보인다"고 말했을 때의 그 어두움이 동일한 빛인지 나는 알 수 없다.

II. 작가와의 인터뷰 (Q : 이영철, A : 박준식)
이번 개인전을 위해 청탁을 받았으나 그를 위해 특별히 비평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평의 시대는 변했다. 지금의 비평은 시장을 위해 존재한다. 예측할 수 없는 예술의 사막화 현상 속에서 먼 길을 떠나는 젊은 작가에게 섣부르게 비평을 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것이라 이 자리에서는 오히려 말을 아끼고 싶다. 대신에 좀더 그가 자신을 발언하는 공간을 주고 그와 가졌던 대화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Q. 세상에 온 이유가 무언가 있다고 느끼는 편인가.
A. 세상에 온 어떤 이유보단 날 때부터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 마치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이 위태롭게 태어나버리곤 또 그런 가운데 결국 기적적으로 수술을 잘 받아 새로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음에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해야만 하고 이뤄내야만 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에 대해 동물의 한 부류로서 또는 고깃덩이의 한 부류로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경우들을 종종 봐왔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이나 해석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그러한 발상과 해석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하고 뻔하디 뻔한 원론적이고 피상적인 생각과 해석들로만 다가왔다. 나의 경우 간혹 오해 받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은 허무주의자도 염세주의자도 아닌 실존주의자에 가깝고 자신의 삶과 작업에 있어서 결과적으론 보다 더 나은 삶과 현실을 위해 붓을 칼 대신 들고 임하는 태도나 다름이 없다.

Q. 혹시 가장 슬펐던 기억,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말해 줄 수 있나.
A. 슬펐던 것은 누군가가 나에 대해,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 또는 대상을 해치려 들거나 망가뜨리려고 했을 때 자신이 너무 계산적으로 접근하거나 패널티에 대한 부담 때문에 지나치게 신중하게 임했던 나머지 제대로 맞서거나 응징하거나 대응하지 못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부분들은 현재까지도 일정 부분 자신의 삶과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에 있는 대나무로 무기를 만드는데 집착하거나 잘 때 옆에 목검이나 식칼을 두고 자거나 다용도 나이프를 평소에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고 돌이나 호신용 도구들을 몇 개씩 꼭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등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기습이나 공격을 당했을 때 결코 당하지 않고 바로 반격하고 응징하는 것에 집착했던 기억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어떠한 측면에선 정당방위나 자력구제라는 키워드로 전시와 작업에서 다뤄지기도 하였는데 현재로선 그것을 핵심 키워드로서 끌고 나가기보단 전반적인 작업들에서 자연스레 녹아드는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짐을 일부 두고와서 집앞 도로에서 급히 무단 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여 2M 정도를 날았다가 떨어졌던 적이 있었고 다행히 타박상 정도만 일부 입었을 뿐 며칠 후 퇴원하며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봤었던 풍경들이나 집에서 그날만큼은 학교도 학원도 전부 쉬고 가족들과 함께 간만에 유쾌한 시간들을 지냈던 기억이다. 그 기억은 아직도 간간히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이외에도 유치원에 다닐 무렵 당시 자신을 담당하던 교사의 불친절함과 강압적인 태도, 괴롭힘에 진절머리가 나서 스스로 원장실로 가서 유치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청하며 결국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 그만두었을 때와 고등학생 무렵 다니던 학교가 인문계였던만큼 점차 원치않는 0교시나 방과후 학습 그리고 야자를 억지로 강요당하기도 하고 점차 주변에서 괴롭히고 훼방을 놓으며 방해하는 교사와 학생들로 인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지치게 되며 방황을 많이 했었다. 그런 끝에 결국 자퇴를 택할까 하다가 잠시 부모님의 권유로 기존 고등학교에서 잠시 벗어나 예술 관련 대안학교에서 영화학을 공부하기도 하였고 또 마침 기회가 되어 기존에 다니던 자신과 맞지 않던 미술 입시학원을 그만두고 미술 작가에게 1대1 과외를 받으며 점차 미술 공부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가는 가운데 결국 고3이 되었을 무렵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며 지겹기만 했던 학창시절과 입시를 마무리했을 때 정말 무척 즐거웠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Q. 빛이 없다면 그림을 어떻게 보게 될까.
A. 빛이 없다면 결국 자신의 시각적 요소를 제외한 청각과 촉각 그리고 인지능력과 두뇌에 따른 상상력을 통해 그림에 대해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자신의 작업은 텍스쳐가 큰 만큼 자신이 점차 눈이 멀어버린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인식하며 그려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더불어 다른 관점에서의 빛과 어둠으로 따져본다면 그것이 선과 악으로 상징된다면 자신이 빛이 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아주 밝진 않겠지만 말이다.

Q. 그림을 그릴 때 주안점을 두는 점은 무엇인가
A. 작업의 준비단계부터 마지막까지 일관적이면서 명분과 정당성이 확고한 주제의식과 전반적인 조형적 구성과 레이어의 밀도,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색채와 함께 어느 한 쪽에 집중됨 없이 균일하면서도 다양한 터치감 마지막으로 강력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완성도 있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Q. 색채가 본인을 어떻게 흥분시키며 자신의 몸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여기나.
A. 자신의 경우 레드 계통과 블랙, 화이트 계통과 색의 삼원색 계통을 많은 부분 사용하는데 특히 레드와 블랙 화이트의 경우 인체를 구성하는 피와 살, 그림자, 뼈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며 상당부분 몰입감과 격정적인 감정들이 다른 색을 대할 때와 분명 다르다. 이는 죽다 살아난 경험과 함께 종종 사고를 당해 찢겨지고 부러진 다친 몸의 모습과 그 흔적들을 상상할 때 오버랩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Q. 그동안 몇 점이나 그렸을까.
A. 일일이 다 세보진 않았지만 작가 활동 시절 동안만을 따진다면 수백 점정도를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아이디어 스케치나 에스키스를 포함한다면 더 될지도 모르겠다.

Q. 대작들을 속도감있게 그리는데. 속도는 무엇인가
A. 회화에서 속도란 얼마만큼 자신의 구상과 계획에 그리고 자신의 작업적 역량과 신체의 움직임에 확신이 있는지에 따라 더욱 빨라지며 어떠한 부분에선 자신의 한계를, 그리고 자신이 성취하고 달성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위해 마치 승부를 한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것은 어떠한 대상이 있기보단 자신의 운명이나 삶의 어느 순간에 난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Q. 작품의 제목은 어떻게 정해지나.
A. 보통 작품의 제목을 지을 때 자신의 경우 처음부터 정하거나 아님 나중에 완성 뒤에 수정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때론 작품의 경향성에 따라 보다 은유적으로 아님 보다 직접적으로 작업의 제목을 정하는데 어떠한 쪽이든 작업의 열쇠라고 생각되는 단어나 문장을 생각하되 이를 은유적으로 할시에 3 - 5번 빙빙 돌려 정하고 직접적으로 할 시엔 1 - 2번 정도 빙빙 돌려 정하는 편이다.

Q. 향후 10년 후 예술가로서 자신이 바라는 모습은
A. 원래 자신의 계획은 30살까지 작가로서 어떠한 성과도 입지도 다지지 못할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이었다. 38살까지 살아있을 수 있게 된다면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마찬가지로 계속 작가로서 작업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임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국내에서 뿐만이 아닌 동서양 전부를 전시와 작품으로 오가며 보다 활발히 자신의 삶과 존재가치 그리고 의미에 대한 확고한 확신과 함께 끊임없이 도전하고 발전을 이뤄내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지만 나의 작업을 어느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대신 시키거나 하는 일 없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일궈내고 그 어떠한 정당이나 정치적 세력에 소속되거나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현혹됨 없이 보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삶의 마지막까지 오로지 작가로서 활동에 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Q. 그림 그리기가 세상과 어떤 관련이 되기를 바라며 작업을 하는가.
A. 나는 그림 그리기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명확히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며 아직은 그다지 힘이 없긴 하나 점차 힘을 키워가며 영향력을 확실히 갖출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을 확고히 믿으며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반드시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열망과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원하는 바에 반드시 도달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도전이 뜻을 함께 하고 있는 모두와 성취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를 원한다.

Q. 문학 작품, 시나 소설을 읽는가
A.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읽는 편이며 시보단 소설을 읽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은 이방인, 동물농장, 노인과 바다, 셜록홈즈 시리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BACK TO PAGE